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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ps

peace 2009/11/19 20:35

연속적으로 보이는 삶의 일상들도
기본적으로는 단계별로의 성장들이 끊임없이 붙어있는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그 시기에는 그 시기만의 해야할 일이 있고,
시간이 지나 또다른 시기가 되면,
앞전 시기의 모습을 털어버리고, 그 시기에 맞는 일을 해야함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20대에는 20대의 모습을,
30대에는 30대의 모습을,
물론 40대, 50대 그 이상에도 그 나이에 맞는 모습을 해야함이,
오히려 그 나이를 벗어나고자 몸부림치려고, 쿨한척하는 일보다 더 맞다할 것이다.

그렇기에 가십란의 연예인들이,
내내 젊음을 유지하고 언제나 세상 초월한 듯이 쿨하게 지내는 모습을 보면,
참으로 가식적으로 보인다.

적어도, 그것은 솔직하지 못하거나 철이 없거나 둘중 하나가 아닐까?

지나버린 시기에 대한 아쉬움은 가슴에 간직하되,
지금을 지금답게 보내는 것이야말로,
나중에 돌아보면 제일 후회없는 일일터.

무엇이든 해낼 수 있고 가질 수 있다는 얘기가
어느정도 시간이 흐르면 결국 선택의 문제로 귀결된다는 것.
하나를 선택하면, 하나는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는 것이야말로
그 시기를 그 시기답게 보낼 수 있게 만드는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you can not have it all.

허공에 떠 있는 얘기들과 삶의 불온함을 애써 평온해보이려는 쿨함으로 감추려드는 모습들은,
언제까지나 통용될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오늘을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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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나 잘하세요.

peace 2009/10/05 23:35

0. 여전히 '번'자의 미학을 설파중인 SHS(이로재홈페이지의 본인 명칭 그대로 인용)의 인터뷰는 나름의 의미가 있었다. 기본적으로 대한민국 건축계의 엄청난 일감들과 그에 맞춰 벌어지는 하향평준화된 수준들에 대해서는 분명 옳은 지적이며, 외국 건축계의 봉으로 불리우는 한국 건축시장도 부끄럽지만 인정할 수 밖에 없는 현실임은 예전부터 인지해온 바다.

1.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상 그렇듯이, 그 원인에 대한 화살을 수준 낮은 건축주들과 얼빠진 행정관료와 '개판'인 한국적 상황에 대한 일갈로 마무리하는데에는 도저히 동의할 수가 없다. 부분적으로 암담한 현실에 대한 지적이 또다시 까마귀 우지짖는 곳에서 홀로 노니는 백로마냥 외부의 탓으로만 전적으로 이루어지고 본인을 제외한 이들을 '골프 치러 다니고 협상하러 다니는' 질 떨어지는 이들로 표현하는 것도 참으로 볼쌍사납기 그지 없다. 

2. 인터뷰 소개마냥 '대한민국 대표 건축가'라면, 지극히 근시안적인 태도와 내 탓은 하나도 없고, 다들 수준 낮기때문에 한탄스럽다라는 식의 얘기가 아닌, 좀 더 큰 얘기와 그 와중에서도 정말 소중하고 긍정적인 힘으로 발전할 수 있는 부분을 지적해줬어야 하지 않을까? 주위 여건의 어려움 속에서도 세계적 수준으로 꿋꿋히 헤쳐나가는 다른 분야의 선구자적 플레이어나 디자이너들이 속속 출현하고 있음에도, 여전히 본인 표현대로 '일할 기회는(일감) 많은데 수준은 개판이다'인 한국적 상황속에서 건축계는 (그리고 소위 '국가대표 건축가'께서는) 왜 이거밖에 되지 않을까?

3. 시대를 지배하는 도그마나 패러다임은 한편으로는 합일된 추진력으로 굉장한 생산적인 활동을 이끌어 낼 수도 있겠지만, 반대로 다양한 생각들을 억압하고, 그 생명력이 사그라들어 다할즈음에는 굉장히 맥빠진 결과물들을 양산해내는 것과 함께 후기 세력들의 공백기를 불러오기 마련이다. 4.3그룹과 한때 Sa로 대표되는 컨텍스트주의자들께서 강림하신 시기도 그러했다. 건축의 '본질'에 대한 강압적이고 강박적인 집착과 대중들과 (그리고 세계인들과) 도무지 소통되기 어려운 그들만의 건축 세계는 10여년전 대한민국 건축계의 허리를 구성하는 다수의 건축가들에게 비슷비슷한 방법의 고만고만한 건축들을 전파하였고, 또한 이들을 주축으로, 대학의 강단에서는 다양한 방식의 사고와 접근을 등한시하는 행태의 교육으로 확산되어갔었다. SHS씨 또한 이 두 세력이자, 알고보면 동일 집단의 핵심인물이었다.

4. 당시 학생들에게 (비록 국내용이지만) 스타 건축가들로 보였던 이들은 실무적인 경험과 디테일적인 생산보다(주로 유학파이다보니 실무적 경험은 부족)는 지극히 주관화되고, 관념화된 얘기들을 담아 헤이리나 파주에서 볼 수 있듯이 내내 비슷한 건물들을 설계해대었다. 또한 학교에서는 외국의 사례처럼, 건물을 짓는 하나의 기술인으로서의 태도와 세장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디테일로서의 기능인의 자세가 기본적으로 이루어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기술과 공학을 등한시한 채 건축의 '본질'에 대한 맹목적인 추구로 이어지는 교육으로, 심지어 같은 분야에 있는 학생들과도 소통의 부족을 야기하기 쉽상이었으며, 이후 학부 5년제 시스템 도입과 함께 이는 더더욱 고착화되어 갔다. 

5. 그 뒤로 10년이 지났다. 당연하게도 대중과의 소통내지는 건축주와의 소통과도 힘들어진 세력들중 상당수는 SHS의 인터뷰처럼 이렇게 일감(!)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설계사무소를 정리한채, 학교로 혹은 외국으로 떠나갔으며, 기술과 공학을 등한시한채 반쪽짜리 기술인도, 예술인도, 인문인도 아닌 묘한 상태로 남게된 건축학과 졸업생들은 이렇게도 일감(!)이 많은 현실속에서 나아지지 않은 열악한 근무환경과 롤모델이 보이지 않는 미래상속에서 혹자는 유학을 가거나, 아예 다른 분야를 택해 진출하기도 하였다.  단적으로 10년전 SHS씨의 수업을 학교에서 함께 받았던 수많은 동기들의 상당수(정확하게는 이 글을 쓰고 있는 본인 1명을 제외한 전원 모두)가 지금은 건축설계업을 떠나 있다는 사실을 단지, '건축가의 중요한 덕목인 굶는 재주'가 없는 이들의 요량으로만 보는 것은 무리가 아닐까?

6. 당시에 주축이었던 건축가 세력들이, 지난 10년을 그렇게 강단에 몸담아오며, 혹은 대안세력으로 Sa를 키워오며, 때로는 헤이리에 다양하지만 비슷한 건축물들을 떼로 지어왔음에도, 지금의 대한민국 건축계와 하다못해 국민들의 건축에 대한 인식을 보다 튼튼하게 하기는 커녕, 신진 세력 조차 제대로 길러내지 못했다면, 그 막중한 책임을 누구에게 물어야할까? 왜 늘 진정한 메이져리티에 있었으면서, 자신이 불리할때면, 늘상 마이너리티마냥 외부의 탓으로만 그 책임을 돌리려할까? 

7. 그렇기에 문제는 소통이라고 생각한다. 본인의 생각만을 강요하고 주입하고, 대중들의 수준을 천대할게 아니라, 대중속에서 출발하며, 대중을 이끌고, 전체적인 인식을 함께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 힐난하고 구정물에서 도도해보이려할게 아니라, 함께 어울릴 수 있고, 그를 통해 생산적인 활동을 이끌어내야한다. 문제는 인터뷰에서처럼, '벤치하나 만드는데도 여기에 들뢰즈니 온갖 이론을 이야기하며 설명하는 진지함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진지함을 강요하는 태도로 발생하는 소통의 부재에 있다. 기술인으로서 기본 덕목인 디테일과 구조적인 이해를 바탕으로하는 디자인 실험이 거세된채, 늘상 비슷비슷한 떡콘크리트 건물에 과도한 관념 과잉의 철학을 주입시킨다한들 소통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또한 교육을 전반하여 건축계 전체와도 소통하여야 한다. 이즘에 가까운 강요가 아니라 다양한 방법과 행위가 인정받고, 그것을 펼칠 수 있도록 하여, 장래의 건축 세력을 키워야 한다. 결국 이러한 소통의 부재로 인해, 작금의 건축계는 소규모 아틀리에와 대규모 펌으로 대변되는 양극단으로 나뉘어 각자의 길을 가고 있으며, 공론화된 담론 하나 없이, 점차 거세지는 외국 건축계의 국내 진출에 대해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하고 있다. 아울러 일감은 넘치면서도 열악한 근무 환경과 변변한 디자인 하나 내세우기 어려운채, 점차 하려하는 이들이 줄어드는 3d 업종으로 변해가는 상황을 목도하고 있는 것이다. 

8. 세계적으로 유명한 건축가들은 결코 그 국민들이 그의 건축 세계를 이해하지 못할만큼 어려운 얘기를 하지 않는다. 포루투갈인들은 알바로 시자의 섬세한 감성과 공간으로 표현되는 인간에 대한 애정을 눈으로 보고 공감하기에 그를 아끼는 것이고, 미국인들은 게리의 심지어 너무나도 장난스럽게 보이는 대중적인 접근을 알기에 그를 가장 미국적인 건축가로 내세우는 것이고, 네덜란드 사람들은 렘쿨하스의 객관적인 데이터와 쉽게 인지되는 대중적 철학에 기반한 건물들로 인해 그를 국민적인 건축가로 꼽기를 주저하지 않는 것이다. 대중을 무시하고 유리된 상황속에서 독야청정하게 새로운 이론과 철학을 꼴사납게 만들고 대중을 가르치려 애쓰는게 아니라,  대중속에서 어울리며 그 속에서 모두가 공유하기 쉬운 건축의 출발점을 모색하는 그네들과는 달리, 국내에서조차 대중과, 그리고 여타의 건축계와 소통이 되지 않는 이를 어떻게 국가 대표로 얘기할 수 있겠고, 아울러 그의 세계적인 건축가로서의 자질을 논할 수 있겠는가?

9. 예전에도 얘기한 바 있지만, 진정한 일류는 아무리 주위 여건이 척박해도 주머니속의 송곳마냥 비죽히 드러나게 마련이다. 주위탓만 할게 아니라 스스로를 돌아보는 노력이 필요하다. 물론 나에게도 해당하는 말이다.

10. 그렇기에 나는 이렇게 일갈하고 싶은 것이다.
 "너나 잘하세요"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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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에 대한 소고

peace 2009/10/05 02:11

한때 겪었던 길위의 각성을 내내 기억하는지라, 아니면 중간까지 진행되다가 결국은 엎어지고야만 여행서적출판에 대한 여전한 갈증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종종 서점에 가면 자연스레,  여행서적코너에 다가가 막연한 서베이정도로 살펴보곤한다.
그러다가 얼마전 지하철 출퇴근용으로 그중 몇개를 집어올려 구입하게 되었다. 적당히 최근들어 유행하는 스타일의 사진과 (자칫 싸구려로 읽힐) 감성적인 감상이 뒤섞인 그럭저럭한 책들을 보다보면, 늘상 느끼게 되는 것이지만, 환상도 이런 환상이 없고, 약장사도 이런 약장사가 없으며, 사기도 이런 사기가 없고, 자뻑도 이런 자뻑이 없지싶다. 
머 나역시 여행의 소중함과 내가 겪은 감흥을 설익은 솜씨로 풀어놓곤하였고 지금까지도 이따금씩 주절대고 있으니 타인의 기호를 논평할 수준도 되지 않음은 전제로 하겠다.

그럼에도, 
천편일률적인 기행서적류에서, 자칫 싸구려 감상이 되지 말아야할 기본 전제조건들은 나름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마찬가지로 그게 아직 길을 떠나지 않는 자들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한다. 그중 하나가 뚜렷한 현실감각이다. 현실과 박리되어 내내 이루어지는 여행에서의 감흥을 초점나간 사진하나와 도대체 무엇을 흉내내려하는지 모를 더듬어대는 초현실적인 단어 몇개로 나열한 어설픈 시와 결부시킨 페이지를 보고 있자면, 물어보고 싶다. 이게 정말 그 사진을 찍는 순간의 진정한 느낌이고, 그때 떠오른 생각이었는지 말이다. 리얼리티가 결여된채, 몽롱한 저너머 세계를 열심히 보여주고자 훗날의 포토샵과 다다이즘으로 뒤범벅된 페이지 하나는 허구요 환상 그 자체이다. 그렇기에, 그 뒤를 따라 시궁창(?)같은 현실을 벗어나 낙원(?)같은 여행지로 떠나는 이들의 한손에는 내내 주체도 못할 dslr이 힘겹게 따라다니고, 어딘지 모르게 있을거 같은 현지인들과의 깨달음에 이르는 교감을 왠지 만들어내야할것같은 느낌에, 지금 이 순간 살고 있는 한국에서는 옆집에 사는 이웃이 누군지도 모르면서, 버거운 일상으로 시름하는 가난한 현지들의 주름에 싸구려 감상을 덧입히고자 무던히도 애를 쓴다. 
그.러.니 시장에는 썩은 토마토만 가득하고, 우유 한통을 사기위해 2-3시간씩 기다려야하는 쿠바인들의 삶은 음악의 풍요로움과 하바나의 바래진 풍경에 대한 찬사로 두껍게 가려지고, 무지하다시피한 일반적인 교육수준과 뒤섞인 복잡한 상황으로 인해 헐벗은 생활을 하는 티벳인들은 신들의 나라로 칭송받으며, 에이즈와 각종 질병및 뼈속까지 찌든 가난으로 허우적대는 인도인들은 10억명의 구루(깨달은 스승)로 포장되기 마련이다. 

 사회가 열악하여 삶이 피곤한 이들을 잠시 엿본 부유한 자들이 그네들의 진정한 문제를 보지 않으려 하고, 지극히 보는 이들의 잣대로 보고싶어하는 이미지에 사로잡혀 리얼리티가 제거된 채 자신의 환상을 사진과 글로 펼쳐내는 것은 솔직하지도 않을뿐더러 실로 재앙에 가깝다. 그렇기에, 한낱 방문객에 불과한 본인 자신의 감흥을 전통내지는 지켜야할 무언인가로 스스로 단정짓고 그들에게 강요하며, 몇년후의 재방문에 변했다며 배신감에 치를 떠는 행태는 지극히 유아적이기만 하다. 그럼 인도인들은 앞으로도 수천수백년 맨발에 인력거나 끌고, 티벳인들은 장사는 하지않고 오체투지만 하고, 쿠바애들은 신발에 구멍난채 시가만 피어대길 바라는 것인가? 우리 자신도 늘상 추구하는 물질적인 욕구와 필연적인 가난 극복에 대한 보편적인 열망을 거세시킨채, 관광지 엽서틱한 순간 하나를 환상적으로 포장해내는 것은 문제가 있으며, 더불어, 팔아 들인 수익의 단 1원도 진정한 책의 주인공들인 현지인들의 실제 상처를 덮어주는데 쓰이지 못하는 지금의 현실은 아이러니하기만하다.        
  

요컨대 삶은 어디나 구차하고 남루하다.
나름대로 오대양육대주를 장기간 여행해보면서 느꼈던 점은
세상 어디를 간다한들 역설적으로 사람 사는 모습이란 것은 그다지 다를게 없다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점이다. 한국의 현실과 극적으로 비견될 천국도 없고, 낙원도 없으며, 기막힌 곳도 없고, 영적으로 충만한 곳도 없다. 사회적인 상황으로만 본다면 오히려 열악하거나 더더욱 어려운 곳들이 그렇지 않은 곳들에 비하면 전세계적으로 많으면 많달까, 그런 곳들에서도 저마다의 행복과 문제점은 늘상 그렇듯이 적절하게 배분되어 있다.

그렇기에,
진정한 여행내지는 기행서적이란
지구촌 동시대인들의 아픔과, 기쁨과, 생각을 있는 그대로 가감없이 보고 나누는 것이며,
그것이 현실이라는 틀에서 리얼리티를 획득했을때,
여행이 끝나고 귀국한 후에도, 그들에게는 지속적인 이해와 관심을,
본인 자신에게는 지금의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데 있어,
긍정적인 에너지를 가져다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마치 언제나 도망칠 수 있는 해방구마냥 여행이 인식되고,
그런 인식을 부채질하는 서적들이 많아지는한,
여행에서의 충만했던 에너지와 감흥을, 여행이 끝난후에의 현실 삶에서의 원동력으로 쓰기보단,
비루한 한국 현실에 대한 부정과 다시금 도피적인 여행에 대한 또다른 갈망으로
소모적인 반복을 계속하게 만들 수 있는 우려가 있다.

어찌보면 삶이야 말로 진정한 여행일터.
우리가 실로 감동하고 충만해야할 곳은
여행서적의 환상적으로 덧씌워진 저곳 어드메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순간을 살아가는 이곳이 아닐까한다.

그러므로 나는 최근들어 종종 매체에서 보곤하는 '여행생활자'라는 듣보잡스런 용어와 그것을 내건채 유유자적하며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행태가 심히 거슬린다. 장기간의 여행이 생활이 된 상황을, 그럴싸하게 포장하고자 나온 단어인듯한데, 무엇이든 생활이 되고 삶이 되면 그 자체가 결코 낭만적으로만 흐를 수 없거늘, 굳이 여행의 단어가 주는 설레임에 생활을 갖다붙여 또다른 판타지를 안겨다주고자 하는 노력은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길고긴 여행의 끝에서 결국에는 현실로 돌아오지 못한 채 타국을 떠도는 수많은 이들의 유아병적인 모습을 여행중 마주칠때마다, 적당한 긴장의 소중함과 바닥에 붙지 못하고 허공에 떠 있는, 허세좋은 삶의 허구성을 동시에 느끼곤한다.

역설적으로 여행이 삶에 붙어 있을때, 현실을 담아내는 원동력이 될때, 
진정한 값어치가 있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이런 투로 무쟈게 솔직하고 투박하게 담아내려고 했다가,
결국 출판사로부터 퇴짜맞은 것을 생각해보면,

오히려 보고 싶은 것을 찾고, 환상을 원하는 독자들에게 맞춤형 서비스 정신으로 입각하여,
색조입힌 구라를 풀어내는 것이 기행서적의 기본 자세일런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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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정

peace 2009/09/15 01:53

1. 지난 몇개월간 신경쓰자니 귀찮고 안쓰자니 허전한, 마치 변비환자의 그것마냥 내내 매달렸던 일을 마치게 되었다. 머 아쉬움과 허전함이 있지만, 후련함만큼은 그 이상이니 그것만으로도 좋다.

2. 꼭 먼가 얽메여 시간 없을때 나중을 기약하며 무엇인가 하고 싶은 일들에 대한 리스트를 떠올리곤 하는데, 그중 하나가 사안을 두며 자주 생각하고 글로써 정리하여 블로그에 남겨보자라는 것이었다. 머리도 써야 돌아가고 생각도 해야 발전이 있겠지하고선 다짐에 다짐을 하느라 이렇게 몇글자 주억거리지만 또 얼마나 갈지는 미지수다.

3. 사실 열혈 블로거까지의 명칭을 확보할 수는 저언혀 없겠지만, 아침 6시출근해서 밤 12시까지 내내 땀흘리던 그 옛날의 건설현장속에서도, 딱 점심시간 1시간만큼은 네이버 그림판에 그림 그려가며 생활일기틱한 그날의 소회를 짧게나마 거의 매일간 올리곤 했었는데, 그나마 그때가 어찌되었건 손으로 끼적거리며 나름대로의 자의식을 소화했던 자기소양의 시간이었음을 뒤늦게 알게 되는 요즘이다.

4. 어른이 되어 간다는 것에 대한 너무나 명징한 부분중 하나는 관계의 범주가 확대되는 과정이라고도 볼 수 있는데, 보다 정확하게 개인적으로 느끼기에는, 일개 개인과 세상의 일대일 관계에 대한 충돌과 그로 인한 희로애락이 지금까지의 과정(어른이 되기전)이라면, 더이상 본인은 개인이 아니며, 본인만이 아닌 주변인들과 특히 책임져야할 가족이 생기는 부분을 부지부식간에 언제나 두뇌에 각인시킨채, 사춘기 투정어린 얘기들이랄지, 본궤도에 진입하지 못한 코흘리개 시절의 한탄들을 접어두는 묵묵한 전진이 돋보이는 시기가 드디어 진정한 남자(머 어른이라고 해두자)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5. 그렇기에 자못 상반대인 두 명제가 충돌하게 되는데, 남자로 거듭나는 이 시대의 어른중에 한명으로써 짐짓 다듬어야하면서도 성찰적인 모습을 보여야 하지 않겠냐는 것과, 질을 이루기전에 피나는 양의 압도적이고도 절대적인 필요성을 아는지라 다소 산발적이면서도 찰나적인 감성이 뒤이을 후회보다 낫지 않을까 싶은 것과의 묘한 상관관계가 이 새벽의 신림동에서 긴장감을 형성하고 있다. 

6. 이런 지극히 인문적인 감성이 라이노 스크림트처럼 데이터화되어 체계적인 분포곡선으로 퍼져있어서 갑작스레 찾으려 평소엔 숨어 있다가도 포인트온하면 주루루룩 알기쉽게  나올 수 있다면,  당장 내일 내가 어떤 감성의 글을 관심두게 될지 미리 알 수 있을 것이고, 따라서 나는 오늘부터 대략 다듬고 다듬어, 보다 성장이 반영된 글이 완성된다면, 위에서 언급한 2개의 명제를 나름 동.시.에. 소화할 수 있는게 아날까 생각해본다.

7. 문득 뉴스에서 봤던 대한민국에서 제일 많은 전기세를 내는 삼성 이재용전무의 집에는 바로 이런 얼토당토 않은 수준의 기발한 장치가 있는게 아닐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다면, 한달에 내 연봉씩이나 되는 돈을 일개 주택에서 전기에 썼다는 이유로 낼 연유가 없지 않겠는가?. 

8. 졸립다. 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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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peace 2009/08/15 02:26


1년하고도 1년전 8월 15일 오늘은,
오랜 길위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아내와의 만남을 시작한 날이었다.

이후,
녹음짙던 태국의 여름이 지나갔고,
입사하느라 만지작거리던 포트폴리오에 묻은 낙엽과,
따스한 손길이 유난했던 추운 겨울 밤바람이 흘러갔으며, 
결혼준비에 정신없던 봄날이 있었다. 

그렇게 맞이한,
1년전 8월 15일 오늘은,
무엇보다 소중한 한 사람과 함께
첫걸음을 내딛은 날이었다.
내내 혼자했던 삶이 이제는 둘이 되었다.


다시금,
발리와 홍콩의 습한 더위,
아파트 16층에서의 서늘한 가을,
거제, 통영의 겨울바다,
보라카이 해변의 후덥지근한 봄을 함께 보냈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간.
오늘 8월 15일의 모습은,
또다른 새식구를 준비하기위해 여념이 없다.
내내 둘이었던 삶이 이제는 셋이 되려한다. 


시간의 더깨가 켜켜이 쌓여가며,
현실은 다양하게도 착착 몸에 감겨가고,
그만큼 감정의 깊이와 폭은 깊고 넓어져간다.

2년전 이맘때에는 나와는 무관한
아주아주 먼 미래의 일로만 생각했던 많은 일들이
이미 현실로 이루어졌거나,
곧 실현될 예정이다.

정말 길위에서 보낸 2년반보다 짧은 시간동안,
5대양 6대주를 다니며 보고 들었던 것보다 더 많은 변화가 있었다.
현실이야말로 진정한 삶의 여행이 아닐 수 없을터.

삶은 이토록 놀랍도록 풍부하고,
또한 빠르기만하다.

아쉬움 없는 인생의 하루하루를 보냈는지
늘상 되돌아보기 마련이지만,
혼자만이 아닌,
함께한 누군가와의 삶에 같이 최선을 다했는지,
가슴에 아로새기며, 
느슨해지는 마음의 고삐를 다잡게 되는 요즘이다.

함께 해서 삶은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고맙소. 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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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oes

peace 2009/04/13 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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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바람은 신발을 타고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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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류와 삼류

peace 2009/03/06 03:09

척박한 한국 건축계의 풍토를 탓하는 것은 이 시대를 사는 이 땅의 건축가들에게 있어, 흔히 있는 일갈이다. 사명을 띈 것처럼, 고매한 정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얘기들을 들어보면, 어느 순간 일감을 준 건축주도, 법적인 규제도, 이러고 있는 상종 못할 사회도, 퀄리티 떨어지는 시공업체도, 본인의 뛰어난(?) 디자인을 구현해내지 못하는 다수의 억압내지는 수준 떨어지는 보조시스템으로 뭉텅그려 비난받기 일쑤다. 그런데 참 궁금하다. 왜 그런 삼류들 속에서 있는 본인은 정작 일류가 되지 못하는 것일까?

건축 디자인이라는 것이 작금의 한국 건축계에서는 필요 이상의 과잉된 관념화로 이뤄지는 경향이 있지만, 그에 대한 개인적인 호불호는 사실 별개의 논외다. 다만, 내재된 개념이 외형화될때 생기는 부분들에 있어 대책없는 방기라든지, 늘상 있어오는 매너리즘적 스타일에 빠져서, 어느 컨셉이든 같은 모양과 비슷한 형태로 나오게 되는 것은 대단히 안타까운 일이다. 문제는 이러한 내적인 건축 개념이 외적으로 구현되는 과정상 충돌하는 많은 부분들이, 건축가에게는 수준 낮은 시공업체의 따라오지 못하는 디테일 정도로 취급되어 실질적으로 방치되어버린다는데 있다. 앞서 언급하였던대로, 수준높은(?) 건축가들이 본인을 제외한 주변을 늘상 폄하하는 발언들이 그것인데, 이것은 명백히 건축가 자신의 책무를 방기하는 것이며, 그렇게 얘기하는 것 자체가 결코 자신들의 수준 또한 크게 다르지 않음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이라 하겠다.

예를 들어, 구조만 하더라도, 컨셉과 필요에 따라 분명 전문적인 지식까지는 아니더라도, 일정부분 합리적인 구조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본인의 컨셉을 구성해야함에도 불구하고, 늘상 같은 철근콘크리트 라멘구조(나 단순 철골보구조)만을 당연하듯이 받아들여 건물을 지으니, 제 아무리 건축가 본인은 건물이 다른것이라고 주장해봤자, 그만저만한 공간들에, 과도한 허풍에 기댄 공허한 컨셉만 가득할 뿐이다. 결국 속살이라곤 늘 같은 떡구조에 보이는 공간이라고는 달라진것이 없으니, 보이지 않는 임금님의 옷을 위해 뭔지도 모를 과도한 양념과잉의 철학과 빈곤한 컨셉이 허접하게 보이는 공간을 가리려 눈가리고 아웅하는 형국이다.

말한마디, 관념한마디가 앞서기 이전에, 진지하게 공간과 컨셉을 위해 구조를 어떻게 구연해야할지에 대한 고민이 선행해야하고, 토털시스템으로 건축설계가 거듭나야 진정으로 오롯히 설계와 컨셉이 일체화될 수 있을 것이다. 건물이 설계서부터 지어지는 과정을 하나의 항해라고 볼때, 실질적인 선장인 건축가들이 시도조차 안하는 자신들의 무능함을 비켜선채, 협력업체인 선원들과 너른 바다를 바라보며, "니들이 쌈마이여서 배가 내 뜻대로 안나가고 헤메고 있다"라고 얘기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며 주객전도라하겠다. 하다못해, 정말로 본인이 늘상 내뱉는 것처럼 국내 협력업체들이 삼류라서 같이 못하겠으면, 영어라도 열심히 해서 외국의 전문 업체들을 통해 본인의 컨셉을 어떻게해서든 구현이라도 하면 좋으련만, 소외된 변방의 건축세계에서 싸구려 철학으로 코묻은 건축과 학생들이나 현혹하고 있으니,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 하기엔 그 시간이 아깝지 않은가? 

스티븐홀의 경우, 부산 영상센터를 제안하며, 한국의 조선 기술을 활용한 두꺼운 격자 철강플레이트를 구조시스템으로 제시하였고, 얼마전 완공한 넬슨아킨슨 미술관에서는 중심공간에서 양옆으로 뻗어나가는 아치형구조로 외부에 일반 기둥이 비치지 않는 빛나는 박스를 완성하였다. 세지마는 두꺼운 몇개의 기둥들 대신 세장한 몇배수의 기둥들을 두어, 기둥이 잘 드러나지 않으면서 공간적으로도 떠있는 구조를 제안하고 있으며, 토요이토의 경우 매번 컨셉에 따라 혁신적인 구조시스템이 뒷받침되며, 건물마다 다른 공간과 구조가 일체화되어 나타나고 있다. 

늘상 공허한 컨셉으로 빈약한 공간을 구성한후 평생 당연시 되어온 모듈따라 기둥박기만을 하고 있는 선장이 어찌 누구를 삼류라 하겠으며 배가 나가지 않는 이유를 남의 탓으로 돌리겠는가?

구조가 바뀌지 않으면 공간은 바뀌지 않는다
아울러, 구조를 포함한 전방위적인 토털시스템이 다르지 않으면, 컨셉은 다르지 않은 것이다.

이제 눈가리고 아웅은 그만 할 때이다.

일류는 결코 환경을 삼류라 탓하지 않는다.
그게 일류와 삼류의 차이다.

진정한 쌈마이(삼류)는 따로 있다.


사고하는 힘을 키우기 위해 글쓰기가 필요함을 느낀다. 정리되지 못한 사고의 얽히고 설혀있음은 내내 괴롭기만 할뿐, 한걸음 나아가는데조차 애를 먹인다. 지나가버린 시간속에서 무엇을 하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기록없이 우두커니 있다가, 어느날 '속절없이 나이만 먹었는데 갈 길은 까마득하구나'를 반복하는 것도 이제 사양이다. 목표가 생겼고, 다가갈 계단을 하나하나 밟아가는 길에 작은 거름이 되길 바라는 바램으로 그 첫장을 열어본다.


1.
 요즘 네이버 한국인캐스트에는 자신의 건축 철학을 소개하는 중견 건축가들의 인터뷰가 심심치 않게 올라온다. 그 중, 눈에 띄는 장면은 (굳이 네이버 인터뷰란의 소개된 이들뿐만 아니라) 상당수의 건축가들이  '한옥'으로 상징되는 '전통'을 자신의 건축 디자인의 원형으로 꼽는다는 점이다. 최근들어 불고 있는, 한옥붐에 부응하여 다각적인 모색을 볼 수 있어 흥미롭기는 하지만, 사실 새로울 것 없는 얘기들의 재탕이다. 좀 더 속을 들여다보자면, 한옥이라는 과거에 대한 존중은 자연스럽게 유년 시절의 소중한 기억과도 연결되고, 지역 공동체의 아련한 아름다움으로 미화되며, 지켜야되고 어떻게해서든 우러내야할 국거리인데 반해, 작금의 현실이라는 것은 늘상 그렇듯이 문제적이고 천민스럽기짝이 없다는 시선이 엿보인다. 이를 바탕으로 과거로 회귀하는 휴머니즘형 건축 철학이 도출되는데, 정리해보면 이렇다.

현재는 지옥(은 아니더래도 상종은 어려운 사바세계: 사람 냄새 안남)
-->과거는 좋았는데(이것이 보통은 한옥내지는 달동네로 형상화되는 아련한 기억들: 사람내음물씬)
--->그래서 복원(내지는 구현 : 인간미 물씬)
---->따라서 본인은 (인간미를 구현한) 인본주의자.

순진하고 착한 생각이기는 한데, 저런 단상정도의 감상에서 시작된 것이 건물의 논리로 발전해 가면서 보이는 비약이랄지 과대한 감정이입은 좀 뭐랄까 세상 참 곱게 살아오신 분들의 가끔씩 보이는 사바세계에 대한 엘리트적인 감흥내지는 영감으로 여겨진다. 낭만으로 뒤덮인 이면의 냉혹한 현실을 모르는, (혹은 의도적으로 간과하려는) 이러한 시선은 사실 우리 주위에서도 늘 쉽게 볼 수 있다.(예를 들면, 진절나게도 가난한 쿠바에 가서 낭만을 일컬으며 체게바라의 향취만을 칭송한다던지, 도심지의 빠듯한 삶에서 힘든 농사일은 없을것처럼 아름다운 전원생활만을 동경한다던지, 사람살기 퍽퍽(하다고 믿는) 이 땅과 대비되는 시선을 담아 유토피아적인 선진국의 사례를 칭찬하는 (일련의 건축가들) 것들이다.

문제는 이렇게 지극히 낭만적인 시선이 현실에서 발현되었을때 만나게 되는 간극이 허위와 위선으로 점철되기 쉽다는데 있다. 전통내지는 과거로 상징되는 '인간미 넘치는 건축'(이와 반대로 일부러 인간미를 박멸하기 위해 설계하는 이가 있을지 의문인, 너무나 당연한 '기본전제'가 어엿한 '건축철학'으로 포장되는 것도 우습지만 어쨌든)이 구현(?)되면서 자행되는 설계사무소 노동자들의 과도한 노동강도와 저임금은 겉으로 내세우는 캐치프레이즈인 인간미와 대척점에 서있다. 인간미를 언급하는 사장님들이 수입 외제차를 몰면서, 고급 와인과 싸구려 엘리트적 감상에 취해 있는 동안, 여타의 업계와 비교해도 퍽이나 낮은 임금과 이에 대비되는 높은 노동시간속에서 그밑의 노동자들은 혹사되며 신음하고 있다. 이러한 관행은 일개 사업장의 최고 책임자가 '소장'도 '사장'도 아닌 도제 시스템의 최고봉인 '선생님'으로 불리우고, '예술가는 힘들고, 가난해야한다'라는 혹사와 저임금을 당연시하는 이상한 테제와 더불어, 지금 이 순간에도 이땅에서 엄연히 자행되는 일이다. 참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2. 
과연 과거는 무조건적인 동경을 받아야만하는 무릉도원이요, 현재는 늘상 부정해야만 하는 천민적인 사고로 뒤범벅되어 있는 아비규환인가? 소위 말하는 '선생님'들이신 건축가들이 늘상 얘기하는 '한옥(으로 상징되는 전통)은 우리의 정신 원형이요 달동네에서 지혜를 배우자'는 식의 얘기가 이 시대를 사는 젊은 우리에게 어떻게 다가올 수 있을까? 경험해보지 못한 과거에서 오는 타인의 향수가 메인이 되어버리면 지금의 현실은 더욱더 그 기반을 부정하는 것이 아닐까? 아파트에서 20년간 살아온 이들에게 심지어 건축가 본인 자신도 여전히 아파트에 살고 있으면서, 전통으로 뭉뚱그려 과거에 대한 회귀 감상을 대단한 건축 철학인양 설파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까? 과거의 한옥(으로 상징되는 전통적 특수성)을 알아야만 이해할 수 있는 건축 철학은 세계 어디에서나 보편적으로 이해되고 쉽게 통용되야할 한국 건축의 세계화에 있어, 시대적으로나 공간적으로 생명력이 약한 것이 아닐까? 달동네 감상을 건축 철학의 정수로 여기는 어느 건축가가 영어 강연때 그 정수에 대한 번역을 MOON VILLAGE 라고 하여 외국 청중들이 실소를 금치 못했다는 웃거나말거나같은 얘기처럼 우리네 국제화 수준이 딱 그정도인 것은 아닐까? 중심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변방에서 재주부리다가 가끔씩 오리엔탈리즘에 경도된 이들에게 보여주는 동남아 휴양지의 전통 공연같은 것은 아닐까?


이제 우리는 더이상 늘상 부정하고픈 현실의 대안으로써 과거(로 상징되는 전통의 형태, 한옥, 지형, 기타등등)로의 막연한 동경에 연연하지 말고, 오히려 지금 있는 상황에 있어 긍정적인 부분과 그것을 극대화 시킬 수 있는 방안에 대해 더더욱 고민해야하지 않을까? 전세계에 유례가 없는, 전국민의 절반이 넘게 살고 있는 아파트를 부정하고 폄하하는 대신에, 다양한 실험이 오갈 수 있는 21세기형 새로운 고층문화로서 제안해보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늘상 바쁘게 살아가는 모습을 담아내는 실험적인 건축으로, 정보 통신 강국의 위상처럼 세계 건축계의 첨병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마져도 굉장히 전문적인 고고학적 해석과 전제를 곁들어야만 번역이 가능한, 대중도 이해못할 '인간미(?)' 넘치는 건축 철학은 이제 그만두고, 더이상 필연적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인디아나존스마냥 멀고먼 어느 곳으로부터 단초를 끌어와야하는 의무감속에 고민하지 말고, 지금의 모습을 당당히 여기며, 현재를 기반으로 과거가 아닌 미래로 나아가야할 건축이 이제 우리에게는 필요할 것이다. 세계로 열린 시야와 함께 현재에서 배우고,  현재를 긍정하며 현재에서 출발해야하는 건축, 그것이 이 땅의 새로운 건축이자 다음 세대의 건축일 것이다.

go slowly

peace 2008/12/15 23:15


hongkong, 2008




한걸음 한걸음 내딛는 것은 참 어렵고 힘든 일이다.
조금은 그럴법한 조급함과 조바심을 거둬내고,
묵묵히 하나하나 최선을 다하는 땀방울이 필요한 시점이다.

지금은 보이지 않는 앞으로의 내 모습도,
그 걸음들의 쌓여감속에서 한조각한조각씩 드러날터.
하루하루의 충실함이 나이테처럼 오롯히 새겨지길 기대한다.


'살아 있음이란 그 자체로 생생한 기쁨이다.

대위는 늘 말했다
사람은 씨팔......누구든지 오늘을 사는거야.

거기 씨팔은 왜 붙여요?
내가 물으면 그는 한바탕 웃으며 말했다.
신나니까..... 그냥 말하면 맨숭맨숭하잖아.'

- 황석영의 '개밥바라기별'중에서.



씨팔.
천천히.
느리게 살자.
그러나 꾸준히,
그리고 즐겁게 말이다. 
ㅎㅎ

cheers cheers cheers

peace 2008/11/30 23:46

seoul, 2008




함께 하는 즐거움속에,
하루하루가 저물어가고,

2008년도 그렇게 뉘엿뉘엿 저 지평선 너머로
몸을 누이기 시작한다.

올 한해는 정말,
30대를 참 제대로 열어젖힌 한 해였지싶다.

이래저래 10년간의 방황에 물리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전공적(?)으로나, 궤도에 진입을 시작케 하는 방점을 찍었으니,
불과 작년 여름정도의 나로서는 상상도 못할 쾌거라 하겠다.




이제 다시 새로운 10년을 맞이해야할터.
기대감이 앞선다.



cheers. cheers. cheers.